외교사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전략'과 발칸사태 그리고 삼제협상, 삼국동맹

라임스톤알파 2022. 2. 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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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도입

2. 독일 통일과 보불전쟁

3. 보-불 전쟁 승리 이후 독일의 대 프랑스 전략

4. 독일의 프랑스 고립전략

5. 발칸반도 정세

6. 발칸반도 정세에 대한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의 입장

    1) 오스트리아의 입장: 자국 내 슬라브족들의 봉기를 경계, 오스만 제국 존속 희망

    2) 러시아의 입장: 슬라브 민족 독립 지지, 지중해 진출 전략

    3) 독일의 입장: 발칸반도 현상유지, 프랑스 고립

7. 제1차 삼제협상(1873)

8. 제1차 삼제협상의 위기

    1) 프랑스의 급속한 회복과 예방전쟁 사건(1875)

    2) 발칸 위기

     ● 반 오스만 터키 국제 여론과 '러시아-터키 전쟁'

     ● 반 러시아 국제여론과'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1877년 12월)

     ● 반 러시아 국제여론 강화와 '베를린회의'(1878년 6월)

     ● 베를린회의 결과의 후폭풍: 제1차 삼제협상 와해 ☞ 독일은 새로운 동맹 필요성 느끼게 됨

9. 독-오 동맹(1879)

10.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우호적 중립 조약

    1) 고립 위기의 러시아, 협박당한 오스트리아: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체결

    2) 제2차 삼제협상의 내용과 유럽 정세에 미친 결과: 

        베를린회의 결과 존중

        러시아: 지중해에서의 영국과의 경쟁에만 집중 가능

        오스트리아: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 유지, 살로니카와 에게해로의 진출 가능

        독일: 프랑스 고립

         ☞ 프랑스에 약간의 당근 제공: 프랑스가 튀니지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 지지 (1881년 5월: 불-튀니지 바르도 조약)

11. 제1차 삼국동맹(1882.5.20): 방어 동맹

    1) 이탈리아: 해외 식민지 경략 좌절

                     실지회복 주의로 인한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충돌 위기

    2) 독일: 프랑스 고립 목적에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임

    3) 제1차 삼국동맹의 핵심 내용과 각 국의 목적

         핵심 내용: 방어 동맹

         독일: 프랑스 고립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실지회복 주의'로 인한 오 v. 이 간 전쟁방지

         이탈리아: 로마 문제, 지중해 문제(튀니지, 모로코, 리비아) - 프랑스 견제

                       실지회복 주의 문제- 오 v이 간 전쟁방지

                       발칸문제-발칸반도에서 현상변경 있을 때 영토 보상 추구

1. 도입

발칸반도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복잡한 민족문제, 외교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임.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발칸반도에 속한 국가들의 위치조차 생소한 경우가 많음.

보-불 전쟁 직후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외교 천재 독일 비스마르크 재상이 어떻게 프랑스를 최대한 고립시키면서,

그 당시 문제였던 발칸반도 문제를 독일이 최대한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는지 알아보고자 함.

이 당시 얽히고설킨 외교 관계는 향후 제1차 세계대전에 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됨.

 

2. 독일 통일과 보불전쟁

수백 여 개의 주로 나뉘어 있었던 독일은 1871년이 되어서야 보-오 전쟁, 보-불 전쟁 승리를 통해 통일 국가가 되었음.

프랑스는 보-불 전쟁 패전의 대가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이라는 책임을 떠안게 되었음.

그리고 그 배상금을 모두 상환할 때까지 프랑스 북부에 독일 군대가 주둔하기로 함.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라이벌 관계에 있었는데, 보-불 전쟁 이후에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은 더 깊어만 졌음.

 

 

3. 보-불 전쟁 승리 이후 독일의 대 프랑스 전략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완전히 재기 불능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3가지 전략을 세움.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음.

 

첫째, 막대한 전쟁배상금

둘째, 알자스-로렌 지방 독일에 할양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산업 발달 지역임)

셋째, 국제적, 외교적으로 프랑스 고립

 

 

4. 독일의 프랑스 고립전략

위 세 가지 전략 중 세 번째인 프랑스 고립 정책은 독일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음.

만약, 프랑스가 재기하여 독일에 반기를 들고 반독일 동맹을 결성한다면, 그 상대는 분명:

동쪽의 러시아나,

남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 (얼마 전, 독일과 전쟁: 보-오 전쟁을 한 바 있음)

가 될 것이 뻔한 상황인데,

 

이렇게 되면 독일은 사방으로 적국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므로, 독일 안보에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았음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러한 상황이 연출될 것임.

따라서, "어떻게 하면 프랑스를 러시아, 오스트리아로 부터 고립시킬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국가 전략 문제였음.

 

그리고, 당장은 다행스럽게도...

독일은 러시아와 우호적이지는 않았어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만큼, 러시아와 중립적인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도 전쟁을 벌이긴 했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

 

 

5. 발칸반도 정세

그러나, 계속 독일이 이렇게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우호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으니......

근대화에 실패한 동쪽의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문제가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함.

그동안 오스만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발칸반도에는 그리스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 세르비아인 등등 온갖 종류의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현대 20세기에 와서 유고 내전이 벌어진 것처럼) 발칸반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서로 간의 사이가 무척 나빴음.

또한, 상당 수의 슬라브 민족들이 발칸반도에 살고 있었는데.... 얘들도 서로 사이가 나빴음...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발칸반도의 슬라브족들이 제각각 독립을 위해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함.

 

 

6. 발칸반도 정세에 대한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의 입장

 

1) 오스트리아의 입장: 자국 내 슬라브족들의 봉기를 경계, 오스만 제국 존속 희망

오스트리아는 자국 내에 상당수의 슬라브 민족이 거주 중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발칸반도의 슬라브계 민족들이 독립을 하게 되면......

그 불똥이 튀어 자국 내의 슬라브 인들도 봉기를 일으킬 것이 두려웠음.

결국, 오스만 제국이 계속 존속하기를 바람.

 

 2) 러시아의 입장: 슬라브 민족 독립 지지, 지중해 진출 전략

러시아는 슬라브계 국가였던 만큼, 범슬라브주의와 지중해 진출 전략과 맞물려,

발칸반도의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을 지지함.

 

 3) 독일의 입장: 발칸반도 현상유지, 프랑스 고립

비스마르크는 당초에 발칸반도 진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입장이었음.

다만, 기존의 '프랑스 고립'이라는 외교적 목적에서 봤을 때,

오스트리아 혹은 러시아 두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할 경우, 다른 한 국가와는 자동으로 적대관계가 될 것이고,

그럴 경우, 프랑스는 그 적대국가와 동맹, 독일에 대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됨.

따라서, 독일은 발칸반도 문제에 있어서 현상유지와 중립을 추구하게 됨.

 

7. 제1차 삼제협상(1873)

그런데,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독일을 신뢰할 수 없었음.

독일은 자국과 과거 전쟁을 벌였던 나리인데,

만약, 독일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적대하게 된다면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스스로 먼저 독일과 러시아에 동맹 결성을 요청하게 됨(1873)

이후, 연쇄적으로 독-러군사 협정(1873.5), 러-오 쇤브룬 협정(1873.6)이 체결되면서 삼제협상이 결성됨.

☞ 삼제협상의 성격은 확고한 동맹은 아니고, 느슨한 형태의 보수세력 간의 결합에 불과함

즉,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황제 셋이서 차 한잔 하면서 진보, 공화, 독립주의자들 욕하고 외교 상담하는 것이라 보면 됨

 

그렇게 독일의 의도대로 발칸반도 문제는 현상 유지되는 듯했으나......

 

 

8. 제1차 삼제협상의 위기

 

1) 프랑스의 급속한 회복과 예방전쟁 사건(1875)

의외로 프랑스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조기에 상환(1873)하게 되고,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은 철수하게 됨.

프랑스의 급속한 회복에 위기를 느낀 독일이 '예방 전쟁론'을 거론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전략물자(말) 금수조치를 취함.

악화일로의 독-불 관계에 러시아가 개입하여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독일은 러시아의 미온적인 태도로 향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됨.

또한, 삼제협상의 허약함을 인식하게 됨.

2) 발칸 위기

● 반 오스만 터키 국제 여론과 '러시아-터키 전쟁'

1875년, 발칸반도에서 드디어 보스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서 슬라브족들이 연속적으로 반-오스만 폭동을 일으켰음.

이 폭동을 오스만 터키는 무자비하게 진압(불가리아의 공포: 불가리아 주민 학살)했고,

오스만 터키의 잔학행위에 대해 국제 여론이 들끓게 됨.

이를 빌미로 같은 슬라브계 국가인 러시아가 오스만 터키를 침공, '러시아-오스만 터키 전쟁'(1877.1)이 발발함

그런데, 이런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경계하는 오스트리아가 있었으니...

러시아는 이런 오스트리아를 일단, 자제시킬 필요가 있었음

                                 러시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조건 제시: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이기면,

                                  1.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오스트리아님께 드림

                                  2. 슬라브 국가들이 독립해도, 거대한 연합체는 설립되지 않을 것임

이리하여, 러시아-오스만 터키 전쟁은 일방적으로 러시아가 전투에 이겨 나가고 있는 와중에....

 

● 반 러시아 국제여론과 '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1877년 12월)

그런데 이번에는 러시아군에 무자비하게 당하는 오스만 군대, 주민들을 옹호하는 국제 여론이 들끓게 됨.

사실, 이는 발칸반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의 획책이라 볼 수 있음

어쨌든, 러시아는 전쟁에 승리하고 1877년 12월, '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이 러시아 오스만 간에 체결되었는데,

협상 내용은:

기존 오스만 영토와 지금의 마케도니아까지 섭렵하는 엄청나게 큰 대 불가리아를 만들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로마니아는 완전하게 독립하고

오스만 터키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카르스와 바툼을 러시아에게 넘긴다.

 

그런데, 러시아는 기존의 오스트리아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 버리고, 국제 여론은 다시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감.

● 반 러시아 국제여론 강화와 '베를린회의'(1878년 6월)

국제 여론은 점점 러시아의 남하와 지중해 진출이라는 위협에 들끓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유럽과 발칸반도의 현상유지를 원했던 독일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잠재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됨

결국,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유럽의 현상유지를 원했던 독일의 중재로 1878년 6월, 발칸사태와 관련된 국가들이 베를린으로 모여서 기존의 조약을 새로 맺게 됨. (베를린회의)

 

베를린회의의 주된 내용은: "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의 내용을 폐기한다."는 것이었음

 

i) 대 불가리아는 셋으로 분할한다.

: 마케도니아는 오스만이 다시 가져가고 남은 불가리아는 둘로 쪼갠다.

ii) 영국은 오스만 터키를 보호하기 위해 키프로스를 얻는다.

iii) 러시아는 바툼을 제외한 발칸과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철군하고 점령한 두 지역을 반환한다.

iv) 오스트리아는 약속되어 있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고 통치권을 인정받는다.(주권은 터키가 보유)

 

● 베를린회의 결과의 후폭풍: 제1차 삼제협상 와해 ☞ 독일은 새로운 동맹 필요성 느끼게 됨

 

자칭 정직한? 중재자를 자처한 독일이 주재한 베를린 회의의 결과 :

 

영국: 키프로스를 얻어, 동지중해로의 진출권이라는 국가이익을 챙기게 됨. (참으로 엉뚱하고도, 외교에 능함)

 

러시아: 러시아-오스만 터키 전쟁의 전리품을 다 반납해야 했고, 난데없는 영국이 동지중해 진출권까지 가져가 버리는 것을 멍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음. (독일이 러시아 편을 들어주지 않음)

그 결과, 러시아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한 독일에 대해 앙심을 갖게 됨

러시아는 독일과 멀어지게 됨으로써 제1차 삼제협상은 이렇게 와해됨.

독일: 삼제협상 붕괴로 인해 안보 위협을 느낀 독일은 보다 공고한 안보 동맹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9. 독-오 동맹(1879)

그것은 바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이리하여, 독-오 동맹(1879년)을 체결하게 됨

이는 같은 독일 언어를 쓰는 국가끼리의 연합이라는 점에서도 자국 여론의 지지를 받았었고,

이전까지는 경쟁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독-오 동맹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지됨.

 

그 내용은 이른바 대 러시아 방위조약 같은 건데 (편승 동맹, 비대칭 동맹, 자치 안보 교환 동맹의 성격을 가짐)

  • 러시아가 둘 중 하나를 침공할 경우 타방은 전군을 동원하여 원조한다.
  • 독일이 러시아가 가담하지 않는 제3 국(예컨대, 프랑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는, 오스트리아는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독-오 동맹은 유럽 정세에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전까지 이런 방위조약/군사동맹은 전쟁을 막 시작하기 전이나 전쟁 중에나 체결되던 1회용이었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처음으로 이런 동맹을 평화시에 체결한 것이 알려지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헉, 저런 거 아무 때나 체결해도 되는 거였어?" 하면서 너도나도 동맹조약을 시작하게 됨.

이는 1차 대전 때, 한 나라의 선전포고가 상대국의 다른 동맹국의 선전포고로 이어져 전쟁의 규모를 불리는 원인이 됨.

 

 

10.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1) 고립 위기의 러시아, 협박당한 오스트리아: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러시아는 베를린 회의의 결과에 몹시 불만이었지만, 

독-오 동맹의 결과, 러시아는 그야말로 고립 위기에 처하게 됨.

러시아는 그 당시, 

발칸반도 남하 정책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세계 패권 경쟁(러시아의 국가적 목표) 중이었음.

주적이 영국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프랑스와 동맹(러시아 군부의 견해)을 맺든지, 아니면 독일과 동맹(러시아 외교부의 견해)을 맺어야 고립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됨.

그런데, 독-오동맹의 결과,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까지 적으로 돌리기엔 무리이므로

1881년, 독일 오스트리아와 새로운 제2차 삼제협상을 체결하게 됨.

러시아로서는 영국과의 세계 패권 경쟁에서 독, 오의 중립을 확보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

 

오스트리아는 이미 독-오 동맹이 있는데, 발칸반도에서 행동을 제약하는 새로운 삼제협상을 체결할 필요를 굳이 못 느꼈지만, "향후 오스트리아의 위기는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지 않아 발생할 것이다"라는 비스마르크의 반 협박에 못 이겨 결국 제2차 삼제협상에 참여하게 됨.

2) 제2차 삼제협상의 내용과 유럽 정세에 미친 결과:

  • 체약국 중 일국이 제4국(러시아로서는 영국, 독일로서는 프랑스)과 전쟁을 하는 경우, 모두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 통치하며, 영유권은 터키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러시아는 존중한다. (사실상, 베를린회의에서 인정된 오스트리아의 발칸반도에의 권리를 러시아가 재인정)

제2차 삼제협상 유럽 정세에 미친 결과는: 

러시아는 이제 지중해에서의 영국과의 경쟁에만 치중할 수 있게 됨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유지되었고, 살로니카와 에게해로의 진출이 가능해 짐

독일은 프랑스를 여전히 고립시킴

☞ 대신에, 왕따 당한 프랑스를 약간 달래줌: 프랑스가 튀니지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지지

                                                         (1881년 5월: 불-튀니지 바르도 조약)

 

 

11. 제1차 삼국동맹(1882.5.20): 방어 동맹

 

1) 이탈리아:

해외 식민지 경략 좌절: 프랑스의 튀니지 획득으로 이탈리아의 해외 식민지 경략은 좌절되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됨

실지회복 주의: 통일 이후에도 탈환하지 못한 지역이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어 오스트리아와 껄끄러운 관계였으며, 

                   북서부의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헌납했기 때문에 프랑스와도 껄끄러웠음.   

                   한 편, 보불전쟁 과정에서 무력으로 교황청이 속한 로마를 이탈리아 지배에 편입시켜 프랑스는 프랑스

                   나름대로 이탈리아에 불만이었음. (로마 문제)

 

2) 독일: 프랑스 고립 목적에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임

이렇게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간에 제1차 3국 동맹이 체결됨.

 

3) 제1차 삼국동맹의 핵심 내용과 각 국의 목적

 

핵심 내용: 방어 동맹, 프랑스 고립

 

독일: 프랑스 고립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실지회복 주의'로 인한 오 v. 이 간 전쟁방지

이탈리아: 로마 문제, 지중해 문제(튀니지, 모로코, 리비아) - 프랑스 견제

             실지회복 주의 문제- 오 v. 이 간 전쟁방지

             발칸문제-발칸반도에서 현상변경 있을 때 영토 보상 추구

 

 

이렇게 프랑스를 완전히 고립시켜버리는 데 성공한 비스마르크 재상이 이끄는 독일은 독일 중심의 유럽질서를 재편.

1884년경에는 세르비아까지 오스트리아 영향 안에 들어오게 만들었고,

독일이 탄생 20여 년 만에 유럽의 강자로 부상하게 됨

 

1890년, 비스마르크는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때 이런 말을 남김:

"언젠가는 발칸반도에서 또 다른 멍청한 일들이 벌어져서 유럽에 대규모 전쟁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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