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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음모론이란 무엇인가

2. 지구 단위의 '그림자 정부'

3. 프리메이슨

  1) 연혁

  2) 활동과 계급

4. 일루미나티

  1) 프리메이슨과의 관계

  2) 연혁

  3) 프리메이슨에로의 침투와 조직 장악

5. '그림자 정부'

  1)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차이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2)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베일에 싸인 목적 공유

  3) 결론

 

1. 음모론이란 무엇인가

앞으로 나갈 내용은 흔히 사회에서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는 내용인 , 과연 음모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음모론이라 함은 사회 또는 세계에 반향을 일으킬 만한 사건에 대해서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사실 정황을 따져 봤을 , 의심되는 점에 대해서 어떠한 배후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아래의 내용들은 증명된 사실이 아니며, 가설이라는 점이다.

 

 

2. 지구 단위의 '그림자 정부'

'그림자 정부' 국가 단위가 아니라 '세계' 단위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뒤에서 조종하는 정부가 존재한다는 ' 지칭한다. " 세계를 조종하는 배후의 세력이 존재한다" 가설이다.

이런 말도 되는 내용을 누가 믿느냐 하는 생각도 있으나, 단순 심증을 뛰어넘는 희한한 사건들의 조합을 통해 이에 대한 가설이 내려진 만큼, 상당히 널리 유포된 가설이라 있다.

 

 

3. 프리메이슨

 

1) 연혁

 

프리메이슨의 시초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혜의 왕이라 불렸던 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건축가 '히람' 호출했고, 왕은 '히람'에게 특수한 건축 기법과 수학적 계산, 그리고 성전 건축에 필수 불가결한 온갖 비밀 지식을 알려준다.

'히람' 이렇게 전수받은 건축 기술을 바탕으로 성전 건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주발로', '주발라', '주발 '이라는  석공이 비밀스러운 건축 기술을 알아내기 위해 '히람' 고문하다가 그를 죽이게 된다. (프리메이슨의 가입 의식을 살펴보면, 명의 신자가 3면에서 가입자를 죽이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이것이 '히람' 죽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히람을 죽인 명의 석공들이 프리메이슨의 시초라 한다. , 이들은 일종의 프리랜서로서 당시, 각국을 돌며 건축업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은 프리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Free) 석공(Mason)이라 불렸다. , 프리메이슨은 어느 조직에 속하지 않은 석공들을 칭했다.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는 프리메이슨 단체의 심벌에 건축도구가 그려져 있는 것이 연유이다.

 

 

이후, 세월이 흘러 1717 유럽에서 석조 건축가들이 정식 사교 단체를 조직했는데로지(Lodge) 불렸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프리메이슨' 단체의 원형이다. 이들은 당시, 첨단 건축 기술을 독점적으로 보유했기 때문에 교회나 국왕으로부터 많은 특혜와 면제를 누리고 있었다. 면세, 여행의 자유, ...

 

프리메이슨은 사교 클럽이었던 만큼, 종교 색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평등' 중시했고, 회원 간의 종교도 존중해 주었다.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불경한 조직으로 비쳤으며, 중세 유럽 가톨릭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해 점차 음지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유럽 카톨릭의 탄압을 받았던 계몽주의 사상가나 특이한 지식인들이 비교적 사상의 자유를 누릴 있었던 단체에 가입하게 되면서 프리메이슨은 세가 확장되는 동시에 '비밀결사' 되어 갔다.

 

2) 활동과 계급

 

 

이들의 '비밀결사' 활동 정황은 오늘날에 까지 어느 정도 이어져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봉사와 자유, 평등의 기치를 들고 사회 활동 내지는 사교 활동을 하고 있으나,

회원이 정해진 계급(33계급에 도달하면 단체의 비밀을 접하게 되고, 비밀 유지 의무와 베일에 가려진 활동에 종사하게 된다고 하는 음모론이 있다.

음모론자들은 세계의 유명한 봉사단체들은 거의 프리메이슨과 연결되어 있고, 회원이 실적을 쌓아 계급이 올라갈수록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와 금전적 혜택이 부여된다고 한다. 진정한 조직의 비밀은 33계급 이상에 도달했을 때에 있다고 한다.

 

 

4. 일루미나티

 

1) 프리메이슨과의 관계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관계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많은 대중들이 단체를 동일한 단체로 알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단체는 처음에 동업 관계와 유사한 관계였다가, 후에 일루미나티가 프리메이슨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2) 연혁

 

세계 부자 순위의 단연 1위는 게이츠라고 알려져 있으나, 음모론자들은 비공식적인 1위는 '로스차일드 가문'이라고 한다. 가문은 계몽사상이 유럽에 유포되던 시절인 18세기 1776 5 1 독일 바이에른 잉골슈타트 대학의 교수였던 아담 바이스하우푸트의 제안으로 '일루미나티'라는 단체를 설립한다.

(프리메이슨과는 완전 별개의 단체임에 유의하자)

 

 

'일루미나티' 함은 라틴어 'illuminatus'에서 유래한 말로서 "계몽하다", "밝히다"라는 의미임.

일루미나티는 시초부터 단체의 목적을 '세계 정부' 건다. , 모든 인종과 종교를 초월해서 하나의 정부가 지구를 지배한다는 의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단체로 비치기도 한다. (시작부터 상당히 급진적이고 위험해 보임)

 

3) 프리메이슨에로의 침투와 조직 장악

일루미나티의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독일 바이에른 정부는 단체의 위험성에 대해 유럽에 경고를 했고, "기성 교단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 이유로 탄압 가해 왔으며, 회원들은 유럽의 각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도피처를 찾던 회원들은 18세기 당시 '비밀결사' 단체로 활동 중이었던 '프리메이슨' 가입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게 된다. 일루미나티들에게 프리메이슨은 매우 매력적인 도피처였는데, 이유는 프리메이슨이 면세, 여행의 자유 많은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고 '비밀결사' 성격이 짙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숨길 있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프리메이슨 안에서도 최대한 두드러지 않는 계급에 머무르며 생존을 추구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자신들의 '세계 정부' 사상을 조금씩 프리메이슨 단체에 유포시키게 된다. 일루미나티들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서서히 프리메이슨의 최고위 계급까지 성장하게 된다.

 

결국, 최고의 자금력을 가진 일루미타티와 온갖 특혜를 향유하던 프리메이슨이 통합되면서 영향력은 급격하게 커지게 되었고, 프리메이슨 조직의 최상위 계급을 장악한 일루미나티들은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좌우할 있을 정도의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5. '그림자 정부'

 

1)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차이

엄밀하게 말하면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은 완전히 다른 단체인데, 현재는 일루미나티가 프리메이슨을 장악했다 보는 것이 음모론계의 통설이다.

 

프리메이슨

 

 

프리메이슨은 오늘날 일루미나티 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공개적이며, 많이 알려져 있다.

원래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박애주의를 원칙으로 세계가 형제애 느끼며 살아가길 바라는 석공들이 만든 사교클럽인 만큼, 현재 500 명가량의 거대 회원수를 자랑한다. 표면적으로는 사회봉사와 자선활동을 지속해 왔다. (다만, 33계급 위의 상층부는 일루미나티의 슬로건을 공유하는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프리메이슨 과거 '비밀결사' 활동해 만큼, 최상층부의 자세한 내막은 가려져 있지만  최상층부는 일루미나티에게 장악되었고, 당연한 결과로 프리메이슨의 목적도 일루미나티의 그것과 동일할 것이라는 것이 음모론자들의 통설이다.

 

일루미나티

 

 

일루미나티 목적은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NWO)라는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정부가 통제한다는 내용인 듯한데, 세계의 완전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일루미나티는 행동 강령 자체가 '은닉성' 지향한다. (오늘날 프리메이슨은 공개 활동을 하고 있다.)

일루미나티의 창시자 아담 바이스하우푸트는 "우리 조직의 위대한 힘은 우리가 은폐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누구에게도  조직의 이름을 발설하지 말고, 다른 이름과 다른 직업으로 위장하라."라고 행동강령을 정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메이슨에 비해 일루미나티는 훨씬 알려져 있고 활동도 거의 수가 없다.

또한, 일루미나티는 '소수정예 엘리트들의 모임' 지향한다. 이들은 공개된 사회에서는 유명한 가문의 일원일 수도 있고, 종교 단체, 심지어 군주국의 왕가의 일부일 수도 있다.

 

 

이들의 가장 힘의 원천은 지구적인 스케일의 어마어마한 경제력이다. 웬만한 나라의 경제력보다도 훨씬 크다.

이러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프리메이슨을 잠식해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일루미나티의 행동 양태의 다른 특성은 목적('신세계질서' '세계 정부 수립'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점이며, 오로지 목적 달성에만 총력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2)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베일에 싸인 목적 공유

결국,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목적은 단체가 동일하다고 있다.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프리메이슨의 상층부가 일루미나티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3) 결론

베일에 싸인 목적을 공유하는  단체(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그림자 정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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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인접 국가들도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우선, 발트해 연안의 소국들인 발트 3국과 리투아니아를 간단히 살펴보자.

 

발트 3국은 소련의 정치 경제체제에 통합되긴 했지만 소련 내에서 가장 유럽적이면서 가장 번영한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우크라이나의 윗쪽 벨라루스의 위에 러시아 서쪽에 위치해 있고,

리투아니아가 가장 아래에 위치한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칼리닌그라드), 벨라루스, 폴란드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북쪽으로 라트비아, 동쪽과 남쪽으로 벨로루시, 남서쪽으로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주 및 폴란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은 발트 해에 면해 있다.

수도는 빌뉴스이다. 면적 65,300, 인구 3,339,000(2009 추계).

리투아니아는 14~16세기에 동유럽 대부분을 지배했던 강력한 제국이었으나, 그 이후 200년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1918~40년의 짧았던 독립국가 시기를 제외하고리투아니아는 1795년부터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시 독일의 통치를 받았으며,

1944년 소련의 위성국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1990 3 11일 새롭게 선출된 의회는 만장일치 투표로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새로운 소비에트 의회는 1991 9 6일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2004년 리투아니아는 유럽 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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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군연합(同君聯合)이란 서로 독립된 2 이상의 국가가 동일한 군주를 모시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요약

1. 유럽에는 동군연합이라는 개념이 있다.

2.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고려-만주심양 동군연합)

3. 나폴레옹 등장으로 민족국가 개념이 싹트면서 동군연합 풍습은 사라짐

 

1. 역사 동군연합

   a. 크누드 대왕의 북해제국(잉글랜드-덴마트-노르웨이-스웨덴)

   b.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왕국

   c. 대영제국-하노버 연합왕국

   d. 카스티야-아라곤 왕국

   e. 기타 동군연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프랑스-나바라 왕국

2. 동군연합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원인

    번째 원인게르만족의 전통 하나인 분할상속제의 영향

    번째 원인 : 국가를 창건자가 아닌 왕의 소유물로 보는 유럽의 관점

3. 고려의 동군연합

4. 동군연합 풍습의 쇠퇴

 

 

1. 역사 동군연합 

 

a. 크누드 대왕의 북해제국(잉글랜드-덴마트-노르웨이-스웨덴)

 

크누드 대왕은 덴마트 스벤 왕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잉글랜드 점령전에 참가함.

이후, 스벤 왕이 죽자 잉글랜드의 왕이

그런데 때마침 그의 형인 덴마크의 하랄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함.

결국 크누드는 덴마크의 왕위까지 이어받게 .

뒤로 번의 정복전쟁 끝에 노르웨이, 스웨덴과 스코틀랜드의 일부를 점령해서 거대한 제국을 세움.

 

이를 흔히 북해제국 또는 스칸디나비아 제국(帝國)이라 부르지만, 사실 크누드는 잉글랜드의 왕이자 덴마크의 왕이었고 노르웨이의 왕이며 스웨덴의 왕이었음.

b.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왕국

 

현대의 영국은 스코틀랜드-잉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음.

그런데, 과거에는 나라가 각각 다른 나라였음(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했음).

1603, 잉글랜드 여왕 아일랜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영국 의회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를 잉글랜드+아일랜드의 왕으로 추대함. 그리하여 스코틀랜드+잉글랜드+아일랜드의 왕이 탄생함.

초창기에는 나라들이 바로 합쳐진 아니었음. 내부 불만이 워낙 심했기 때문.

애초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서로 앙숙관계였으므로......

지금도 서로 사이가 좋음....ㄷㄷㄷ

 

결국, 시간이 지나고 번의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UK, 연합왕국이 탄생을 하게 .

 

c. 대영제국-하노버 연합왕국

1701년에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윌리엄 3세도 후계자가 없었음(여기에서 온갖 고민이 시작됨)

 

그래서 처제인 앤과 그녀의 아이(처조카) 왕위 후계자로 정했으나, 안타깝게도 처조카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남.  

그리하여 제임스라는 영국 국교회가 아닌 가톨릭 교도였던 자가 왕위계승권자로 떠오름.

 

사실이 다른 여러 이유와 맞물리면서윌리엄 3세는 카톨릭 교도인 제임스의 즉위를 막기 위해 '영국 국교회가 아닌 사람은 왕위를 계승할 없다'라고 왕위 계승 법을 개정해버림.

 

윌리엄 3세가 왕위 계승 법을 바꾸자, 새로이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그 루드비히 왕위계승권자로 떠오르게

후에 그는 조지 1 영국 왕에 즉위하고, 이때부터를 하노버 왕조라고 부르게

(하노버 왕조의 출발이 내각책임제의 시초라고 있음조지 1세는 영어를 못해서 하원 의원들에게 정치에 관한 대부분의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

 

따라서, 지도의 초록색인 조지 1세가 종전에 갖고 있던 하노버 땅은 당연히 조지 1세가 계속 통치하게

쉽게 말해서 조지 1세는 영국의 왕이자 하노버의 선제후가 .

 

나라가 서로 다른 나라다 보니, 상속법에서도 차이가 있었음

영국의 경우는 여자의 왕위 상속을 인정했지만, 독일은 인정하지 않았음

그래서 후에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했을 나라는 서로 갈라지게 .

 

d. 카스티야-아라곤 왕국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결혼하면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이 추진됨.

나중에 페르난도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동군연합이 이루어짐.

그런데 나라 역시 동군연합이 되었을 바로 합쳐진 것은 아니었음.

다만 거의 나라처럼 통치되었고 후에 에스파냐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게 .

 

에스파냐는 뒤이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를 왕으로 맞이함

카를 5세도 합스부르크 왕가답게 결혼 상속으로 많은 영토를 손에 넣음.

그런데,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왕실의 결합으로 나라가 되었으나, 땅에 살던 국민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은 아니었음.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라곤 왕국 일부 지역(카탈루냐) 오랫동안 독립을 외치고 있음.

 

e. 기타 동군연합

나라들의 경우 말고도 유럽에는 다양한 동군연합이 존재했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프랑스-나바라 왕국 

 

 

2. 동군연합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원인

 

번째 원인게르만족의 전통 하나인 분할상속제의 영향

로마가 망한 , 게르만 족이 대이동 하면서 많은 왕국들을 세움

게르만 족은 전통적으로 분할상속이 원칙. (장자상속제 없었음)
초기에는 이런 전통을 충실히 지켰고 때문에 자식들에게 왕국을 나눠서 주는 일도 많았음

그런데, 땅을 나눠서 받게 되면 후손들이 받을 있는 몫이 적어지면서 점점 나라의 힘이 약해지게 되므로, 

후손들은 친척들의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수없이 반목하게 .

분할상속제가 계속되면 될수록 나중에는 받을 있는 땅이 매우 적어지게

 

그렇기 때문에 힘을 합치기 위해 가문 간의 정략결혼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족보가 복잡해져서 동군연합 같은 개념이 생겨남.

 

번째 원인 : 국가를 창건자가 아닌 왕의 소유물로 보는 유럽의 관점

유럽에서는 국가를 철저하게 소유물로 보았음.

그렇기 때문에 어느 귀족이라도 왕과 혈연적인 관계에 있다면 왕위 계승권을 갖게 .

 

유럽 왕가들은 복잡한 혼인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A나라의 귀족이 B나라의 왕과 친척관계일 수도 있었고 그것을 빌미로 왕위를 이어받게 되면서 자연스레 동군연합이라는 것이 생겨남.

 

그에 비해 동양의 경우는 국가를 왕이 아닌 창건자의 소유로 보았음.

그러므로, 오직 창건자와 후손만이 국가를 소유하고 왕이 있었음.

왕조가 바뀌면 나라 이름이 바뀌는 이유가 그런 이유에 연유함.

그에 비해 유럽은 왕조는 바뀌어도 나라 이름은 바뀌지 않았음.

 

 

3. 고려의 동군연합

 

동군연합이 동양에서는 드문 개념이긴 하지만동양에서도 동군연합과 비슷한 비슷한 사례가 가끔 있었음.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과 인종 명의 황제를 옹립한 공으로 고려왕  심양왕 봉해짐

후에 충선왕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충선왕은 실각한 고려의 왕위는 장자에게심양의 왕위는 조카에게 물려주었음

엄밀히 말하면 위의 사례도 동군연합의 일종임.

그러나, 고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했을 그의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고려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았으므로, 자신이 심양왕에 오를 정통성이 있음을 알았지만, 명과의 관계 개선 대외적인 왕위 인정을 위해 심양왕의 권리를 포기하게 . (조선은 스스로 만주 심양의 권리를 포기했음)

 

 

4. 동군연합 풍습의 쇠퇴

동군연합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점차 사라지게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혁명정신과 민족주의를 들고 전쟁을 벌이게 되고, 그것이 유럽에 퍼져나가면서 이상 왕이 자기 마음대로 영토를 주고받는 행위를 없게 .

이로써 민족국가 개념이 싹트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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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폴란드는

1. 나폴레옹의 괴뢰 국가로서 독립운동실패

2. 폭동을   일으킴실패

3. 1 세계 대전  독일과  패였는데어부지리로 독립 성공

 

 

1. 폴란드 분할과 국가 소멸

2. 프랑스혁명

3. 라인 동맹

4. 바르샤바 공국

5. 폴란드 분리독립운동

11 봉기 (Powstanie listopadowe)

1 봉기(Powstanie Styczniowe)

6. 1 세계대전

폴란드 2공화국(II Rzeczpospolita)

동유럽 민족주의 대두와 국경 분쟁

 

 

1. 폴란드 분할과 국가 소멸

1795 폴란드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한테 분할되어 국가가 사라짐

분할의 원인은 침략당해서 그런  아니라 귀족들이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위한답시고나라를 팔아넘긴 .

 

2. 프랑스혁명

 

그런데,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집권함.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훗날 종신 집권을 하고  유럽과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

 

당시프랑스혁명이 자국으로 퍼질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혁명을 진압하려 했음.

프랑스혁명정부는 1792년에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갔고

이에 대응하여 프로이센러시아스페인영국도  프랑스 연합 전선을 형성했음.

 

프랑스혁명 당시 폴란드는 국가가 분할되는 혼란기였고 다음  9 23일에 2 분할이 일어나고 1795년에 삼차 분할이 일어나서 지도에서 사라짐.

 

3. 라인 동맹

한편나폴레옹은 전쟁의 천재답게 프로이센오스트리아를 간단히 제압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제압한 이후 이름뿐이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했음.  

그리고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있던 여러 약소국들(바이에른작센베스트팔렌뷔르템베르크 ) 모아서 라인 동맹을 만들었음라인 동맹은 프랑스 괴뢰 동맹에 불과했음

따라서 신성로마제국 속국들 중에서 라인 동맹에 가입   나라는 프로이센 왕국오스트리아 제국 말고는 없었음...

 

4. 바르샤바 공국

라인 동맹이 프랑스 괴뢰 동맹 1호였고 프랑스 괴뢰 동맹 2호는 바르샤바 공국이었음.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다시 독립시키고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프랑스 괴뢰국가를 세워 .

폴란드인들은 자기 나라를 독립시켜준 대가로 많이들 나폴레옹 편에 참전했음.

그래서 현대 독일영국러시아스페인오스트리아 등에서 나폴레옹의 평가가 좋지 않은 반면,

폴란드에서는 나폴레옹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음독립시켜줬기 때문.

 

바르샤바 공국 영토에 사는 인구 대부분은 폴란드인이었음.  

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리투아니아인 사는 (Kresy) 바르샤바 공국이 아니었음.

 

하지만 나폴레옹이 무리하게 러시아 원정을 시도했다가러시아 청야 전술에 패배하고 돌아오는 바람에 바르샤바 공국(Księstwo Warszawskie)은 8 만에 러시아한테 망함...

러시아는 폴란드  대부분을 러시아에 복속시킴

 

참고로유제프 포니아 토프스키라는 폴란드 귀족은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장군이었는데 프랑스의 지원으로 독립하자 프랑스를 도와서 프랑스군 원수까지  사람임.

근데 라이프치히에 있던 강을 포니아 토프스키가 건너는 도중 프랑스군이 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다리를 끊는 바람에 전사하게 .

 

1795 폴란드 분할:

폴란드인 거주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먹은 반면,

 

이제는 러시아가 바르샤바(Warszawa), 칼리시(Kalisz), 쳉스토호바(Częstochowa) 같은 폴란드인 땅까지 먹어치웠음.

 

프로이센은 포즈난(Poznań), 비드고슈치(Bydgoszcz), 그니에즈노(Gniezno) 먹었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크라쿠프(Kraków) 먹었음.

 

 

5. 폴란드 분리독립운동

 

11 봉기 (Powstanie listopadowe)

 나라 중에 러시아가 가장 통치를 가혹하게 했음그래서 폴란드 분리독립운동이 계속 일어났음.

1830년에 러시아령 폴란드 왕국에서 항러시아 폭동이 일어났음. (11 봉기, Powstanie listopadowe)

폭동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군대로 강력히 진압했음.

 

 

1 봉기(Powstanie Styczniowe)

하지만 폴란드 민중들은 33 후인 1863 1 22   봉기를 일으킴. 1 봉기(Powstanie Styczniowe)

11 봉기는 폴란드인들만 일으켰지만 1 봉기는 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들이 분리 독립을 위해 일으킨 점이 다름.

당시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 때문에 군사력이 약해 보였음...

그래서 1861년에 11 봉기 30 기념 시위를 하면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음.

시위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니까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섬.

하지만 폴란드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서도 폭동이 일어났음.

같은 동슬라브족인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서 폭동이 일어난 이유는 현지에 사는 폴란드 귀족들이 폭동을 주도했기 때문.

 

1 봉기에 참가한 폴란드리투아니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사람들은  20 명에 이름.

정규군 출신도 있고낫을 들고 참전한 민중들도 있었음.

이에 러시아 제국은 폭동 진압을 위해 12 명을 투입함.

 

그러나 결국 폭동이 진압되고 러시아령 폴란드 왕국을 러시아 제국 내지(內地) 편입시킴.

그리고 러시아는 폴란드어를 사용  하게 하는  여러 가지 민족 말살 정책을 펴게 .

또한 폭동을 주도한 천명은 사형, 삼만  천명은 시베리아행 명은 해외(프랑스프로이센미국 ) 망명했음.

 

6. 1 세계대전

1914년에는 1 세계 대전이 발발했음.

 

1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군단(Legiony Polskie) 만들어서 동맹국 편으로 싸웠음

폴란드 군단 지휘관은 전설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장군이었음.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원수는 리투아니아 빌뉴스(Wilno)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음.

젊은 시절부터 러시아 사회당 폴란드 지부에 가입했음.

근데 거기서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 민족주의 폴란드 독립운동이었음.

 

폴란드인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서 싸운 이유는 독립을 약속받았기 때문.

그래서 폴란드인들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장군 밑에서 싸웠음.

 

폴란드 2공화국(II Rzeczpospolita)

그런데독일군이 폴란드인들을 직접 지휘하려고 하자폴란드인들이 항명 했음.

독일은 피우수트스키 장군을 잡아 가두고 폴란드 군단을 해산시킨 다음이들을 멀리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버림.

 

그러자 폴란드인들은 당연히 탈영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음.

 

한편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제정 러시아는 망했고

공산주의자들은 1918 3 3동맹국과 휴전 협정(브레스트 조약) 맺고 영토 상당수를 포기했음.

브레스트 조약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포기한 영토는에스토니아라트비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가 전부 독일 영향권에 들게 .

 

그래서 원래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를 독일이 지배하도록 계획되었는데....

 

독일 제국도 혁명이 일어나서 망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해산됨....ㄷㄷㄷ

오스만 튀르크 제국도 멸망함....ㄷㄷㄷ

 

결국폴란드도 독일이 망하니까 어정쩡하게 독립을 .

마침 공산주의 혁명으로 러시아도 망했고 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망함.

그러자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에 속하던 폴란드 땅은 전부 신생 독립국 폴란드 2공화국(II Rzeczpospolita) 속하게 .

그리고 독일 측에 구금되었던 피우수트스키 장군도 석방되었고 피우수트스키 장군은 폴란드 독립군을 이끈 공로로 임시 총통(Naczelnik Państwa) .

또한 독립 동맹국 편에 참전했던 폴란드 군단은 그대로 신생 폴란드군에 편입.

 

피우수트스키 소장은 독립 공로로 2공화국에 의해 원수로 특진그리고 임시 총통   총사령관을 맡았음.

공식적인 폴란드 독립 기념일이 1918 11 11 .

 

 

동유럽 민족주의 대두와 국경 분쟁

문제는 폴란드만 독립한  아니었다는 ...ㄷㄷㄷ

 

당시 19세기, 20세기  유럽은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벨라루스 독립

우크라이나 독립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리투아니아 독립

라트비아 독립

 

결국폴란드와 국경을 맞대던 우크라이나벨라루스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라트비아도 독립했다는 문제가 발생함.

 

문제는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라트비아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는 역사상 만들어진 적이 없는 나라임.

 국경선도 없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신생국들(벨라루스우크라이나라트비아체코슬로바키아)끼리 영토 분쟁하면서 치고받고 싸우게 .

1919 3폴란드 2공화국 당시 폴란드는 체코슬로바키아우크라이나소련과 전쟁 중이었고 훗날 실레지아 독일인들과 리투아니아와도 싸우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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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대 말부터 1795년까지의 폴란드-러시아 관계

 요약
1. 폴란드는 러시아 내란에 개입해서 모스크바를 2년간 점령한  있음.
2. 폴란드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유럽과 오스트리아를 지켜   있음.
3. 폴란드 왕권 다툼 때문에 폴란드가 러시아 보호령이 되었고 귀족들이 알아서 나라를 외세에 바쳐 나라가 사라짐

목차
1. 폴란드스웨덴과도 앙숙이 
2. 러시아지역 왕조
   a. 류리크 왕조 (Rurik dynasty)
   b. 로마노프 왕조 (Romanov Dynasty)
3. 대홍수(Potop): 폴란드 몰락의 대전쟁
4. 폴란드의 오스만 투르크 격퇴
5.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
   1 폴란드 분할 (1772)
   2 폴란드 분할 (1793)
   3 폴란드 분할 (1795)

1. 폴란드스웨덴과도 앙숙이 
폴란드 왕된지 7 후인 1599 시기스문트는 스웨덴 왕에서 폐위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으로 남게 .
그래서 시기스문트는 폴란드군을 동원해서 스웨덴  자리를 되찾으려 했으나...진압당함.
그래서 이후 폴란드는 모스크바 뿐만 아니라 스웨덴과도 적대국이 .

2. 러시아지역 왕조

a. 류리크 왕조 (Rurik dynasty)
모스크바 대공국이 3 로마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이반 4(이반 뇌제) 모스크바 대공국을 루스 차르 국(Царство Русское)으로 개명했다.

차르는 황제를 뜻함.
그동안 유럽에 왕은 많았지만 황제라고 칭 나라는 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신성 로마 제국밖에 없었음
차르(Царь단어  어원은 로마 제정이 시작하게 만든 카이사르 이름.
카이사르는 후에 캐사르로 발음이 변하고 이게 슬라브어에서 구개음화가 일어나서  채사르로 발음이 변했음.
실제로 폴란드어에서도 채사르와 비슷한 발음인 Cezar 쓰고러시아어에서도 Цезарь로 여기서 ез가 탈락되어 Царь가  .

러시아에서 이반 4세의 아들 표도르 2세는 후사가 없이 죽었는데,
표도르 2 동생인 드미트리는 어릴 적에 요절함.
그런데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드미트리가 살아있다는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했고이에 자기가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자가 등장함.

가짜 드미트리는 러시아 입장에서 사기꾼에다가 매국노였음.
표도르 2세가 죽자 표도르의 장인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드미트리가 고두노프를 쫓아내고 집권하기 위해 영토 분쟁이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기 때문.

가짜 드미트리 1세는 폴란드 귀족들을 속여폴란드 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음.
보리스 고두노프가 살아있을 때는 러시아가 우세했는데고두노프가 병사하자 드미트리 군대가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드미트리가 황제가 .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군을 이용해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폴란드 앞잡이라고 욕먹었으며폴란드 여자랑 결혼까지 그리고 가짜 드미트리는 무능했음.
그래서 러시아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가짜 드미트리는 도주하다가 향년 25세의 나이로 근위병들한테 참살됨.
치세는 1년이었음.

가짜 드미트리가 참살된 다음 이반 4세의  친척인 바실리 4세가 즉위함

그런데 다음 해에 또다른 가짜가 나타남 자는 사실 자기가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이며 1  황궁에서 무사히 도망쳐 살아남았다고 주장함.
그러고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는 스웨덴군한테 진압당함.

스웨덴군이 가짜 드미트리를 진압하니까,

스웨덴과 적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지원함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바실리 4세를 체포했고 바실리 4세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끌려가서 폴란드 바르샤바 감옥에 끌려가서 사망함.

그런데 가짜 드미트리 2세도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

가짜 드미트리 2세가 죽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이었던 시기스문트(Zygmunt III) 아들 브와디스와프(Władysław IV) 러시아 차르로 선출됨.
근데 브와디스와프가 차르가 되려면 폴란드 종교인 가톨릭에서 러시아 종교인 정교회로 개종해야 되는데, 개종을 거부하는 바람에 차르 자리를 얻질 못함.


대신폴란드군은 모스크바를 2년간 강점하게 .

b. 로마노프 왕조 (Romanov Dynasty)
하지만 러시아 차르 집안의 외척이었던 로마노프  귀족들은 폴란드의 지배를 받아들일  없었음.
그래서 의용군을 모집해서  폴란드 반란을 일으키고 러시아를 해방시킴.
결국 2 후인 1612년에 폴란드군은 모스크바를 버리고 퇴각함.

그리고 외척 로마노프 가의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에 선출됨이로써 류리크 왕조는 막을 내림.

하지만폴란드가 모스크바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러시아는 서부 영토 일부를 폴란드에 넘겨주고 전쟁을 패배로 끝남.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폴란드프러시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남에스토니아서우크라이나중앙 우크라이나벨라루스 전체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지방까지 진출하였음.
중부 유럽과 동유럽을 제패한 .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공용어는 폴란드어라틴어였지만 인구의 절반은 루테니아어( 벨라루스어우크라이나어) 사용했음그만큼 영토가 넓었음.


3. 대홍수(Potop): 폴란드 몰락의 대전쟁

한편폴란드-러시아  전쟁이 끝난 지 30 되는 해인 1648우크라이나 코사크 귀족들은 폴란드 귀족(Szlachta)들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킴.
이번 반란에는 또다른 피지배 민족이었던 타타르족까지 끌어들임타타르족 종교는 이슬람교

우크라이나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자 폴란드군 7만 명이 우크라이나 폭도 14만 명을 진압함.
그러자 러시아가 같은 동슬라브족을 구원하겠다며 1654년에 우크라이나벨라루스서러시아를 침공

1618년에 브란덴부르크( 베를린 지방선제후가 폴란드의 조공국인 프러시아 공작을 겸임하게 .
 기회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러시아 독립을 위해 폴란드 공격에 동참.

그리고 폴란드와 적대 관계였던 스웨덴까지 러시아 편으로 참전.

이게 바로 대홍수(Potop)라는 폴란드 몰락의 대전쟁이었음.
대홍수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인구의 1/3 잃고 동부 영토 상당수를 잃게 .

남색이 브란덴부르크 연두색이 스웨덴청록색이 러시아.
노란색이 폴란드 남은 영토.......
 

실레지아랑 갈리치아 빼고는 전부 스웨덴이랑 러시아가 빼앗음.
스웨덴은 폴란드프러시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를 빼앗았고,
바르샤바와 크라쿠프까지 스웨덴한테 함락당하게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벨라루스스몰렌스크 지방을 빼앗았음.

그리고 우크라이나벨라루스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박해당함.

폴란드가 스웨덴한테 이렇게 털린 이유는 브란덴부르크와 러시아의 참전도 있었지만 폴란드 왕권이 약했기 때문.
폴란드는 왕을 선거로 뽑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입김이 너무 강했음.
그래서 전쟁이 나더라도 귀족들의 동의가 없으면 군대를  보냈음.
스웨덴이 쳐들어왔을  많은 귀족들은스웨덴 편에 붙었음.
귀족들은 스스로 항복했고결국 바르샤바(Warszawa) 크라쿠프(Kraków) 스웨덴에게 함락됨.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의   2(Jan II) 바르샤바(Warszawa)에서 우크라이나 갈리치아 지방의 르부프(Lwów) 피신했지만폴란드의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 의용군을 이끌고 스웨덴의 침략에 맞섬.

결국 1년만인 1657, 폴란드 땅에서 스웨덴 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함.

하지만 러시아와 브란덴부르크와는 아직 전쟁 중이었음.
일단브란덴부르크와 화친을 맺어서 브란덴부르크의 영지였던 프로이센은  이상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조공을 바치지 않게 결국 프로이센은 1657 독립함.

그리고 1667년에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길고 길었던 전쟁을 끝냄.
다만 조건이 있었는데,
지금의 키예프(Kijów) 있는 중앙 우크라이나 지역을 러시아에 넘겼고
스몰렌스크(Smole
ńsk) 지방도 러시아에 넘겼음.
이로써 러시아는 키예프 루시 고토 회복을 조금이나마   있었음.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과 러시아에게 양분 당하는 일은 피했지만,
전체 인구의 1/3 죽고 프로이센중앙우크라이나스몰렌스크를 상실했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667년을 계기로 동유럽의 강대국에서 밀려났음.

이후스웨덴은 러시아에게 대북방 전쟁에서 패배해서 스웨덴도 강대국에서 밀려남.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일개 지방에 지나지 않았던 브란덴부르크는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음.
영지였던 프로이센이 독립했기 때문.
 이후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등장.

4. 폴란드의 오스만 투르크 격퇴
1684년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남유럽에서 점점 북진하더니 오스트리아 (Wien)까지 올라와 포위하게 .

폴란드는 같은 가톨릭이었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원군 8만 명을 보냄.
오스만 투르크 군이  성벽을 부수면서 쳐들어 가는 시점에 폴란드 윙드 훗사르가 쏟아져 나와 오스만 군을 격퇴함.

이번 전투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 얀 3(Jan III) 직접 참전해서 대승을 거두게 됨.

폴란드,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15000명 가량 죽었는데 오스만 투르크는 60000명이 죽어버림.

폴란드 덕분에 오스만 투르크는  이상 북상하지 못했고,
폴란드는 기독교 세계를 수호했다는 명성을 얻게 되어기독교 세계의 방파제가 .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 몰락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음.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도 같이 몰락을 하기 시작했음.

1697년에 승전을 이끈  3(Jan III) 심장마비로 고인이 되고,

작센 출신 아우구스트 2(August II)  폴란드 왕으로 선출됨

아우구스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공격을 멈췄음.
그리고 리보니아( 라트비아에스토니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계획했지만,
친스웨덴 폴란드 귀족들이 그를 폐위시킴.
그리고 스타니스와프 1(Stanisław I) 왕이 .

폐위된 아우구스트2세는 러시아 표트르 1세한테 가서 원군을 요청함.
러시아는 군대를 끌고 와서 스타니스와프를 축출하고 아우구스트를 다시 권좌에 앉혔음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입김을 받게 .

1733년에 아우구스트 2세가 죽자 친스웨덴 파였던 스타니스와프 1(Stanisław I) 다시 왕이 .

그러자, 이에 반발한 친러파와 친스웨덴파의 갈등이 일어났고,
아우구스트 2세의 장남 아우구스트 3(August III)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폴란드를 침공함.


5.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
그래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땅에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 일어나게 .
스타니스와프가 친스웨덴이었지만 스웨덴 국력은 이미 러시아한테 추월당해 버렸고,
스타니스와프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기대게 되었음.
그래서 폴란드 땅에서 프랑스(+스페인) VS 러시아(+오스트리아전쟁이 일어났음.
결국 스타니스와프 1세는  한번 왕에서 쫓겨나고 아우구스트 2 아들인 아우구스트 3세가 왕이 .
그래도 스타니스와프 1세는 프랑스로 가서 로렌 공작까지 하면서  먹고  살았음.  

결국폴란드는 러시아의 보호 상태에 놓이게 .

폴란드가 러시아 보호령이 되자 이에 반발한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뜯어먹으려 하기 시작함.

 

1 폴란드 분할 (1772)
전쟁이 끝난지 30 되는 해인 1768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한번 반란이 발생함.
어차피 폴란드는 러시아 속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영토를 뜯어가도 크게 상관없었음.
그래서 1 폴란드 분할이 일어났음
(1772)

 

1차 분할 후:

프로이센은 독일인이 많이 사는 포메라니아를 가져가고,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서쪽은 폴란드인동쪽은 우크라이나인),
러시아는 동북 변방 지대(동슬라브족 대부분) 가져감.

2 폴란드 분할 (1793)
1 분할로 영토 상당수(211,000 km² 한반도 크기 정도) 450만명의 인구를 잃은 폴란드는 1791유럽에서 두 번째의 성문헌법(1등은 로마) 만드는 개혁을 실시했으나이번에도 씨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킴.


결국 1793 9 23 귀족 의회(Sejm) 열렸고귀족 의회에서 2 폴란드 분할에 대한 찬반 표결이 이루어짐

 결과폴란드 2 분할이 폴란드 귀족들의 손으로 이루어짐.  

대폴란드 지방(폴란드인 다수) 프로이센에 넘어가고,
동벨라루스우크라이나가(동슬라브족 다수러시아에 넘어갔음.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서 1789년에 일어난 혁명에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 구출하러 원군을 보내느라 폴란드 분할에 참여 못했음

 

대폴란드와 크레시 절반인 307000 km ²을 상실함.

결국외세에 빌붙은 폴란드 귀족들을 몰아내고자 폴란드 국민들(폴란드 국민 90% 투표권이 없었음) 폭동을 일으켰으나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에게 진압당함

3 폴란드 분할 (1795)
그리고, 1795년에 폴란드 3 분할이 일어났고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짐.
외세의 침략이라기 보다는 폴란드 왕권 다툼과 귀족들이 나라를 망하게  .

 

바르샤바(Warszawa), 비아위스토크(Białystok), 수바우키(Suwałki) 지방은 프로이센이 가져감.
인구 대부분은 폴란드인이었고 유대인이나 독일인이나 리투아니아인도  있었음

크라쿠프(Kraków), 루블린(Lublin) 오스트리아가 가져감.
인구 대부분은 폴란드인이었고 유대인이나 독일인도  있었음.

리투아니아라트비아 남부크레시(동슬라브족 영역서부는 러시아가 가져감.

리투아니아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대다수였음.
라트비아 남부는 라트비아인이 대다수였음.
크레시 서부는 동슬라브족이 대다수였음.

이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지도상에서 사라짐.

앞으로 123년간은 폴란드-러시아 관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나라가 사라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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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러시아 관계는 감정의 골이 매우 깊음.

폴란드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11 11 독립기념일만 되면 폴란드 길거리에서 러시아인들이 구타당하기도 .

도대체 같은 슬라브족이면서도 서로 으르렁대는지 역사를 통해 알아보고자 .

 

1. 인종적 특성

2. 폴란드 민족 국가 형성

3. 러시아 지역의 슬라브족 민족 국가 형성

   a. 키예프 루시

   b. 노브고로드 공국

4. 폴란드 왕국 분열

5. 폴란드 통일과 영토 확장

6.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영토 확장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서러시아 리투아니아가 정복했고,

    (오늘날 리투아니아 vs.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가 사이가 좋지 않은 시초가 )

   서우크라이나 폴란드가 정복함.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이권 주장의 시초가 )

7. 모스크바 대공의 "모스크바는 3 로마" 주장

8.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동프로이센 독일 기사단 정복

9. 악연의 시작:

   a.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러시아 충돌

   b.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 동군연합

 

 

 

1. 인종적 특성

폴란드와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족임.

같은 슬라브족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사이가 좋지 않음

 

전반적으로 폴란드인이 러시아인보다 콧대가 뾰족하고 인상이 강함. 

러시아인들은 핀란드, 튀르크, 몽골 등의 아시아 황인종과 혼혈이 되었기 때문.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폴란드가 러시아보다 인상이 날카로움.

 

지도의 동북쪽 지금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에 Venedi라고 써진 인종들이 슬라브족의 조상이라 있음.

 

폴란드랑 러시아가 서로 다른 민족으로 나눠진 계기는 흉노족들 때문.

원래 슬라브족들은 지금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지방에 살았는데 흉노족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동유럽으로 침공을 시작하면서 슬라브족들이 서쪽이나 북동쪽이나 남쪽으로 퇴각하게 .

서쪽(동유럽 방면)으로 이동한 슬라브족이 폴란드인, 체코인, 소르브인, 슬로바키아인들

북동쪽(러시아 북쪽 방면)으로 이동한 슬라브족이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남쪽(발칸반도 방면)으로 이동한 슬라브족이 세르보크로아티아인, 불가리아인, 슬로베니아인이 .

이때가 서기 400 경으로 슬라브족(폴란드인의 조상) 동슬라브족(러시아인의 조상) 갈리는 계기가 .

 

비록, 서슬라브와 동슬라브, 남슬라브 개념은 서기 400 경에 생겼지만, 폴란드인, 러시아인, 세르비아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 같은 세부적인 민족은 서기 900년에서 1000 경에 생겼음우리로 따지면 고려시대...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의 역사는 정도 된다고 보면 .

 

문제는 서슬라브족이 도망친 곳은 게르만족 영토였고, 동슬라브족이 도망친 곳은 핀란드족 영토였으며, 슬라브족이 도망친 곳은 일리리아족 영토랑 상당히 겹침.

거기 원래 살던 게르만, , 일리라아 족은 서슬라브, 동슬라브, 남슬라브 족한테 동화됨...

 

 

2. 폴란드 민족 국가 형성

폴란드 민족이 생긴 시기는 966.

미에슈코 1(Mieszko I) 가톨릭으로 개종한 년도가 바로 966년임.

안쪽에 진분홍색으로 CIVITAS SCHINESGHE라고 써진 부분이 966 폴란드 영토.

바깥쪽 빨간 테두리 안이 당시 992 폴란드 영토. 30 만에 주변 슬라브족(포메라니아인, 실레지아인)들을 정복.

 

 

3. 러시아 지역의 슬라브족 민족 국가 형성

 

a. 키예프 루시

동슬라브족 지역에서는 862년에 키예프 루시 건국됨. (지금의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변방에 불과했음)

국명에서 있듯이 키예프(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 중심지였음.

하지만, 키예프는 몽골의 제후국 금장 한국(킵차크 칸국, 지금 카자흐스탄 일대)한테 정복되고 도시가 철저히 파괴됨.

 

b. 노브고로드 공국

변방에 살던 모스크바 사람들까지 몽골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고, 몽골의 조공을 피해 북쪽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지금의 북부 러시아 일대에 노브고로드 공국 세웠음.

노브고로드는 노브(Нов-새롭다라는 형용사의 어근)+고로드(город-도시( 발음은 고라트에 가까움)) 합성어.

따라서, 노브고로드는 새로운 도시(신도시)라는 .

몽골을 피해 북으로 도망친 러시아인들의 의중이 반영되었다 있음.

 

 

4. 폴란드 왕국 분열

사이 폴란드에서는 왕이 죽고 나서 아들들이 나라를 분리해서 상속 받음(국가 분열: 유럽에서는 흔한 ).

수많은 공작 귀족 작위가 덤으로 탄생...ㄷㄷㄷ

프랑크 왕국이나 독일이 나눠진 것처럼 폴란드도 여러 개로 쪼개짐.

폴란드는 결국 나라가 일곱 개로 쪼개지고 실롱스크(Śląsk) 보헤미아에 의해 합병됨.

폴란드는 국력이 크게 약화됨:

체코가 폴란드로부터 실레지아를 할양함.

포메라니아(그단스크(=단치히) 있는 ) 폴란드에서 이탈해서 자유 도시가 되거나 독일 세력에 편입됨.

 

이후, 년간 폴란드는 내전에 시달렸으며 몽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러시아족한테 침략을 당함.

 

결국, 폴란드의 마조비아 대공은 독일 십자군 기사단에게 프러시아 발트족 정벌 요청을 하게 .

독일 십자군 기사단은 프러시아 발트족 땅을 정복함.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은 프러시아를 얻게 .

 북쪽은 독일인이 많이 살고 남쪽은 폴란드인들이 이주하게 .

 

5. 폴란드 통일과 영토 확장

1320년에는 쿠야비아 공작 출신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1(Władysław I) 폴란드를 다시 통일함.

아들 카지미에시 3(Kazimierz III) 대왕이 몽골의 침공으로 약화된 서부 우크라이나를 정복해서 영토를 확장함.

 

하지만 카지미에시 3 대왕은 후사가 없어, 헝가리 루드비크(Ludwik) 폴란드 왕을 겸임했음.

루드비크 역시 아들 없이 죽고, 그의 살짜리 야드비가(Jadwiga)에게 자리를 물려줌.

 

 

6.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영토 확장

, 폴란드 북쪽에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는 33살짜리 노총각 요가일라(Jogaila) 대공을 하고 있었음.

그가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어, 폴란드 왕까지 겸하게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동군연합이 됨.

몽골의 침입으로 동슬라브족이 정신없는 사이:

벨라루스, 동우크라이나, 서러시아는 리투아니아가 정복했고,

(오늘날 리투아니아 vs.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가 사이가 좋지 않은 시초가

서우크라이나는 폴란드가 정복함.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이권 주장의 시초가 )

 

7. 모스크바 대공의 "모스크바는 3 로마" 주장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정략결혼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 공주 소피아와 정략결혼을 하게 .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해외로 망명한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임.

따라서, 이반 3세는 정략결혼과 동시에 황제를 칭하면서 "모스크바는 3 로마"라고 갖다 붙임.

(2 로마는 콘스탄티노플)

 

 

8.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동프로이센 독일 기사단 정복

한편, 러시아에서 "모스크바는 3 로마" 어쩌고 하고 있을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프로이센 지역의 독일 기사단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짐.

결국그룬발트(Grunwald, 200 독일 기사단과 폴란드 마조비아 공국이 같이 정복한 )에서 독일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승부를 벌임.

그룬발트는 남부 동프로이센 지역. (1945년에 여기 살던 독일인들은 전부 추방당했고 영토를 폴란드인들이 차지)

 

그룬발트에서 리투아니아 기병대가 독일 기사단한테 거짓으로 패주 하면서 독일 기사단을 숲으로 유인, 속에서 폴란드 기병대가 매복을 풀고 나타나 독일 기사단을 격퇴함독일 기사단장도 전사...... ㄷㄷㄷ

독일 기사단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항복하고, 동프로이센 전체가 폴란드에게 조공을 바치게 .

 

 

9. 악연의 시작

 

a.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러시아 충돌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앙유럽에서 동유럽까지 진출하게 .

모스크바 대공국도 팽창하고 있었으니 이제 폴란드와 러시아가 충돌하게 것은 시간문제가 .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동우크라이나, 서러시아를 정복했는데,

원래 벨라루스나 동우크라이나나 서러시아는 키예프 루시의 영토였는데, 리투아니아가 정복한 것임.

그래서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영토 수복을 주장했고 곧바로 모스크바 서쪽에 위치한 러시아 일대를 침공했음.

1차는 폴란드 , 2차는 러시아 , 3차는 무승부.

이때가 바로 폴란드의 윙드 훗사르가 활동한 시절.

이때부터 폴란드-러시아 악연이 시작됨

폴란드는 윙드 훗사르의 활약으로 서러시아의 스몰렌스크(Smoleńsk)까지 정복함.

 

b.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 동군연합

한편,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선거 군주제를 채택했는데, 말이 선거지 사실은 귀족 회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인구의 10% 참여할 있었음.

선거 결과, 뜬금없는 스웨덴 왕자가 왕이 되었음(1587). 그의 이름은 시기스문트 3(Sigismund III, Zygmunt III).

이후, 1592년에 시기스문트의 아버지 요한 3(Johan III) 붕어하면서 시기스문트는 스웨덴 왕까지 물려받아,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 동군연합 탄생함.

 

하지만 7 후인 1599 시기스문트는 스웨덴 왕에서 폐위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으로 남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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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도입

2. 독일 통일과 보불전쟁

3. 보-불 전쟁 승리 이후 독일의 대 프랑스 전략

4. 독일의 프랑스 고립전략

5. 발칸반도 정세

6. 발칸반도 정세에 대한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의 입장

    1) 오스트리아의 입장: 자국 내 슬라브족들의 봉기를 경계, 오스만 제국 존속 희망

    2) 러시아의 입장: 슬라브 민족 독립 지지, 지중해 진출 전략

    3) 독일의 입장: 발칸반도 현상유지, 프랑스 고립

7. 제1차 삼제협상(1873)

8. 제1차 삼제협상의 위기

    1) 프랑스의 급속한 회복과 예방전쟁 사건(1875)

    2) 발칸 위기

     ● 반 오스만 터키 국제 여론과 '러시아-터키 전쟁'

     ● 반 러시아 국제여론과'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1877년 12월)

     ● 반 러시아 국제여론 강화와 '베를린회의'(1878년 6월)

     ● 베를린회의 결과의 후폭풍: 제1차 삼제협상 와해 ☞ 독일은 새로운 동맹 필요성 느끼게 됨

9. 독-오 동맹(1879)

10.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우호적 중립 조약

    1) 고립 위기의 러시아, 협박당한 오스트리아: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체결

    2) 제2차 삼제협상의 내용과 유럽 정세에 미친 결과: 

        베를린회의 결과 존중

        러시아: 지중해에서의 영국과의 경쟁에만 집중 가능

        오스트리아: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 유지, 살로니카와 에게해로의 진출 가능

        독일: 프랑스 고립

         ☞ 프랑스에 약간의 당근 제공: 프랑스가 튀니지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 지지 (1881년 5월: 불-튀니지 바르도 조약)

11. 제1차 삼국동맹(1882.5.20): 방어 동맹

    1) 이탈리아: 해외 식민지 경략 좌절

                     실지회복 주의로 인한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충돌 위기

    2) 독일: 프랑스 고립 목적에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임

    3) 제1차 삼국동맹의 핵심 내용과 각 국의 목적

         핵심 내용: 방어 동맹

         독일: 프랑스 고립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실지회복 주의'로 인한 오 v. 이 간 전쟁방지

         이탈리아: 로마 문제, 지중해 문제(튀니지, 모로코, 리비아) - 프랑스 견제

                       실지회복 주의 문제- 오 v이 간 전쟁방지

                       발칸문제-발칸반도에서 현상변경 있을 때 영토 보상 추구

1. 도입

발칸반도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복잡한 민족문제, 외교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임.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발칸반도에 속한 국가들의 위치조차 생소한 경우가 많음.

보-불 전쟁 직후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외교 천재 독일 비스마르크 재상이 어떻게 프랑스를 최대한 고립시키면서,

그 당시 문제였던 발칸반도 문제를 독일이 최대한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는지 알아보고자 함.

이 당시 얽히고설킨 외교 관계는 향후 제1차 세계대전에 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됨.

 

2. 독일 통일과 보불전쟁

수백 여 개의 주로 나뉘어 있었던 독일은 1871년이 되어서야 보-오 전쟁, 보-불 전쟁 승리를 통해 통일 국가가 되었음.

프랑스는 보-불 전쟁 패전의 대가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이라는 책임을 떠안게 되었음.

그리고 그 배상금을 모두 상환할 때까지 프랑스 북부에 독일 군대가 주둔하기로 함.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라이벌 관계에 있었는데, 보-불 전쟁 이후에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은 더 깊어만 졌음.

 

 

3. 보-불 전쟁 승리 이후 독일의 대 프랑스 전략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완전히 재기 불능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3가지 전략을 세움.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음.

 

첫째, 막대한 전쟁배상금

둘째, 알자스-로렌 지방 독일에 할양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산업 발달 지역임)

셋째, 국제적, 외교적으로 프랑스 고립

 

 

4. 독일의 프랑스 고립전략

위 세 가지 전략 중 세 번째인 프랑스 고립 정책은 독일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음.

만약, 프랑스가 재기하여 독일에 반기를 들고 반독일 동맹을 결성한다면, 그 상대는 분명:

동쪽의 러시아나,

남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 (얼마 전, 독일과 전쟁: 보-오 전쟁을 한 바 있음)

가 될 것이 뻔한 상황인데,

 

이렇게 되면 독일은 사방으로 적국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므로, 독일 안보에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았음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러한 상황이 연출될 것임.

따라서, "어떻게 하면 프랑스를 러시아, 오스트리아로 부터 고립시킬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국가 전략 문제였음.

 

그리고, 당장은 다행스럽게도...

독일은 러시아와 우호적이지는 않았어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만큼, 러시아와 중립적인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도 전쟁을 벌이긴 했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

 

 

5. 발칸반도 정세

그러나, 계속 독일이 이렇게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우호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으니......

근대화에 실패한 동쪽의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문제가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함.

그동안 오스만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발칸반도에는 그리스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 세르비아인 등등 온갖 종류의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현대 20세기에 와서 유고 내전이 벌어진 것처럼) 발칸반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서로 간의 사이가 무척 나빴음.

또한, 상당 수의 슬라브 민족들이 발칸반도에 살고 있었는데.... 얘들도 서로 사이가 나빴음...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발칸반도의 슬라브족들이 제각각 독립을 위해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함.

 

 

6. 발칸반도 정세에 대한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의 입장

 

1) 오스트리아의 입장: 자국 내 슬라브족들의 봉기를 경계, 오스만 제국 존속 희망

오스트리아는 자국 내에 상당수의 슬라브 민족이 거주 중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발칸반도의 슬라브계 민족들이 독립을 하게 되면......

그 불똥이 튀어 자국 내의 슬라브 인들도 봉기를 일으킬 것이 두려웠음.

결국, 오스만 제국이 계속 존속하기를 바람.

 

 2) 러시아의 입장: 슬라브 민족 독립 지지, 지중해 진출 전략

러시아는 슬라브계 국가였던 만큼, 범슬라브주의와 지중해 진출 전략과 맞물려,

발칸반도의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을 지지함.

 

 3) 독일의 입장: 발칸반도 현상유지, 프랑스 고립

비스마르크는 당초에 발칸반도 진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입장이었음.

다만, 기존의 '프랑스 고립'이라는 외교적 목적에서 봤을 때,

오스트리아 혹은 러시아 두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할 경우, 다른 한 국가와는 자동으로 적대관계가 될 것이고,

그럴 경우, 프랑스는 그 적대국가와 동맹, 독일에 대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됨.

따라서, 독일은 발칸반도 문제에 있어서 현상유지와 중립을 추구하게 됨.

 

7. 제1차 삼제협상(1873)

그런데,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독일을 신뢰할 수 없었음.

독일은 자국과 과거 전쟁을 벌였던 나리인데,

만약, 독일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적대하게 된다면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스스로 먼저 독일과 러시아에 동맹 결성을 요청하게 됨(1873)

이후, 연쇄적으로 독-러군사 협정(1873.5), 러-오 쇤브룬 협정(1873.6)이 체결되면서 삼제협상이 결성됨.

☞ 삼제협상의 성격은 확고한 동맹은 아니고, 느슨한 형태의 보수세력 간의 결합에 불과함

즉,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황제 셋이서 차 한잔 하면서 진보, 공화, 독립주의자들 욕하고 외교 상담하는 것이라 보면 됨

 

그렇게 독일의 의도대로 발칸반도 문제는 현상 유지되는 듯했으나......

 

 

8. 제1차 삼제협상의 위기

 

1) 프랑스의 급속한 회복과 예방전쟁 사건(1875)

의외로 프랑스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조기에 상환(1873)하게 되고,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은 철수하게 됨.

프랑스의 급속한 회복에 위기를 느낀 독일이 '예방 전쟁론'을 거론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전략물자(말) 금수조치를 취함.

악화일로의 독-불 관계에 러시아가 개입하여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독일은 러시아의 미온적인 태도로 향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됨.

또한, 삼제협상의 허약함을 인식하게 됨.

2) 발칸 위기

● 반 오스만 터키 국제 여론과 '러시아-터키 전쟁'

1875년, 발칸반도에서 드디어 보스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서 슬라브족들이 연속적으로 반-오스만 폭동을 일으켰음.

이 폭동을 오스만 터키는 무자비하게 진압(불가리아의 공포: 불가리아 주민 학살)했고,

오스만 터키의 잔학행위에 대해 국제 여론이 들끓게 됨.

이를 빌미로 같은 슬라브계 국가인 러시아가 오스만 터키를 침공, '러시아-오스만 터키 전쟁'(1877.1)이 발발함

그런데, 이런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경계하는 오스트리아가 있었으니...

러시아는 이런 오스트리아를 일단, 자제시킬 필요가 있었음

                                 러시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조건 제시: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이기면,

                                  1.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오스트리아님께 드림

                                  2. 슬라브 국가들이 독립해도, 거대한 연합체는 설립되지 않을 것임

이리하여, 러시아-오스만 터키 전쟁은 일방적으로 러시아가 전투에 이겨 나가고 있는 와중에....

 

● 반 러시아 국제여론과 '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1877년 12월)

그런데 이번에는 러시아군에 무자비하게 당하는 오스만 군대, 주민들을 옹호하는 국제 여론이 들끓게 됨.

사실, 이는 발칸반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의 획책이라 볼 수 있음

어쨌든, 러시아는 전쟁에 승리하고 1877년 12월, '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이 러시아 오스만 간에 체결되었는데,

협상 내용은:

기존 오스만 영토와 지금의 마케도니아까지 섭렵하는 엄청나게 큰 대 불가리아를 만들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로마니아는 완전하게 독립하고

오스만 터키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카르스와 바툼을 러시아에게 넘긴다.

 

그런데, 러시아는 기존의 오스트리아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 버리고, 국제 여론은 다시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감.

● 반 러시아 국제여론 강화와 '베를린회의'(1878년 6월)

국제 여론은 점점 러시아의 남하와 지중해 진출이라는 위협에 들끓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유럽과 발칸반도의 현상유지를 원했던 독일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잠재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됨

결국,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유럽의 현상유지를 원했던 독일의 중재로 1878년 6월, 발칸사태와 관련된 국가들이 베를린으로 모여서 기존의 조약을 새로 맺게 됨. (베를린회의)

 

베를린회의의 주된 내용은: "산 스테파노 강화 협상의 내용을 폐기한다."는 것이었음

 

i) 대 불가리아는 셋으로 분할한다.

: 마케도니아는 오스만이 다시 가져가고 남은 불가리아는 둘로 쪼갠다.

ii) 영국은 오스만 터키를 보호하기 위해 키프로스를 얻는다.

iii) 러시아는 바툼을 제외한 발칸과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철군하고 점령한 두 지역을 반환한다.

iv) 오스트리아는 약속되어 있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고 통치권을 인정받는다.(주권은 터키가 보유)

 

● 베를린회의 결과의 후폭풍: 제1차 삼제협상 와해 ☞ 독일은 새로운 동맹 필요성 느끼게 됨

 

자칭 정직한? 중재자를 자처한 독일이 주재한 베를린 회의의 결과 :

 

영국: 키프로스를 얻어, 동지중해로의 진출권이라는 국가이익을 챙기게 됨. (참으로 엉뚱하고도, 외교에 능함)

 

러시아: 러시아-오스만 터키 전쟁의 전리품을 다 반납해야 했고, 난데없는 영국이 동지중해 진출권까지 가져가 버리는 것을 멍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음. (독일이 러시아 편을 들어주지 않음)

그 결과, 러시아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한 독일에 대해 앙심을 갖게 됨

러시아는 독일과 멀어지게 됨으로써 제1차 삼제협상은 이렇게 와해됨.

독일: 삼제협상 붕괴로 인해 안보 위협을 느낀 독일은 보다 공고한 안보 동맹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9. 독-오 동맹(1879)

그것은 바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이리하여, 독-오 동맹(1879년)을 체결하게 됨

이는 같은 독일 언어를 쓰는 국가끼리의 연합이라는 점에서도 자국 여론의 지지를 받았었고,

이전까지는 경쟁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독-오 동맹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지됨.

 

그 내용은 이른바 대 러시아 방위조약 같은 건데 (편승 동맹, 비대칭 동맹, 자치 안보 교환 동맹의 성격을 가짐)

  • 러시아가 둘 중 하나를 침공할 경우 타방은 전군을 동원하여 원조한다.
  • 독일이 러시아가 가담하지 않는 제3 국(예컨대, 프랑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는, 오스트리아는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독-오 동맹은 유럽 정세에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전까지 이런 방위조약/군사동맹은 전쟁을 막 시작하기 전이나 전쟁 중에나 체결되던 1회용이었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처음으로 이런 동맹을 평화시에 체결한 것이 알려지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헉, 저런 거 아무 때나 체결해도 되는 거였어?" 하면서 너도나도 동맹조약을 시작하게 됨.

이는 1차 대전 때, 한 나라의 선전포고가 상대국의 다른 동맹국의 선전포고로 이어져 전쟁의 규모를 불리는 원인이 됨.

 

 

10.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1) 고립 위기의 러시아, 협박당한 오스트리아: 제2차 삼제협상(1881년 6월 18일) 

러시아는 베를린 회의의 결과에 몹시 불만이었지만, 

독-오 동맹의 결과, 러시아는 그야말로 고립 위기에 처하게 됨.

러시아는 그 당시, 

발칸반도 남하 정책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세계 패권 경쟁(러시아의 국가적 목표) 중이었음.

주적이 영국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프랑스와 동맹(러시아 군부의 견해)을 맺든지, 아니면 독일과 동맹(러시아 외교부의 견해)을 맺어야 고립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됨.

그런데, 독-오동맹의 결과,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까지 적으로 돌리기엔 무리이므로

1881년, 독일 오스트리아와 새로운 제2차 삼제협상을 체결하게 됨.

러시아로서는 영국과의 세계 패권 경쟁에서 독, 오의 중립을 확보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

 

오스트리아는 이미 독-오 동맹이 있는데, 발칸반도에서 행동을 제약하는 새로운 삼제협상을 체결할 필요를 굳이 못 느꼈지만, "향후 오스트리아의 위기는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지 않아 발생할 것이다"라는 비스마르크의 반 협박에 못 이겨 결국 제2차 삼제협상에 참여하게 됨.

2) 제2차 삼제협상의 내용과 유럽 정세에 미친 결과:

  • 체약국 중 일국이 제4국(러시아로서는 영국, 독일로서는 프랑스)과 전쟁을 하는 경우, 모두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 통치하며, 영유권은 터키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러시아는 존중한다. (사실상, 베를린회의에서 인정된 오스트리아의 발칸반도에의 권리를 러시아가 재인정)

제2차 삼제협상 유럽 정세에 미친 결과는: 

러시아는 이제 지중해에서의 영국과의 경쟁에만 치중할 수 있게 됨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유지되었고, 살로니카와 에게해로의 진출이 가능해 짐

독일은 프랑스를 여전히 고립시킴

☞ 대신에, 왕따 당한 프랑스를 약간 달래줌: 프랑스가 튀니지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지지

                                                         (1881년 5월: 불-튀니지 바르도 조약)

 

 

11. 제1차 삼국동맹(1882.5.20): 방어 동맹

 

1) 이탈리아:

해외 식민지 경략 좌절: 프랑스의 튀니지 획득으로 이탈리아의 해외 식민지 경략은 좌절되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됨

실지회복 주의: 통일 이후에도 탈환하지 못한 지역이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어 오스트리아와 껄끄러운 관계였으며, 

                   북서부의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헌납했기 때문에 프랑스와도 껄끄러웠음.   

                   한 편, 보불전쟁 과정에서 무력으로 교황청이 속한 로마를 이탈리아 지배에 편입시켜 프랑스는 프랑스

                   나름대로 이탈리아에 불만이었음. (로마 문제)

 

2) 독일: 프랑스 고립 목적에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임

이렇게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간에 제1차 3국 동맹이 체결됨.

 

3) 제1차 삼국동맹의 핵심 내용과 각 국의 목적

 

핵심 내용: 방어 동맹, 프랑스 고립

 

독일: 프랑스 고립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실지회복 주의'로 인한 오 v. 이 간 전쟁방지

이탈리아: 로마 문제, 지중해 문제(튀니지, 모로코, 리비아) - 프랑스 견제

             실지회복 주의 문제- 오 v. 이 간 전쟁방지

             발칸문제-발칸반도에서 현상변경 있을 때 영토 보상 추구

 

 

이렇게 프랑스를 완전히 고립시켜버리는 데 성공한 비스마르크 재상이 이끄는 독일은 독일 중심의 유럽질서를 재편.

1884년경에는 세르비아까지 오스트리아 영향 안에 들어오게 만들었고,

독일이 탄생 20여 년 만에 유럽의 강자로 부상하게 됨

 

1890년, 비스마르크는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때 이런 말을 남김:

"언젠가는 발칸반도에서 또 다른 멍청한 일들이 벌어져서 유럽에 대규모 전쟁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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